김영나, 알파벳 스티커를 떼고 남은 흔적에서 찾는 가볍고도 무거운 <Easy Heavy>
입력: 2024.05.13(월)
수정입력: 2024.05.17(금)
2024. 5. 8 - 6. 30
Easy Heavy
김영나Na Kim
국제갤러리 부산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코스COS, 에르메스Hermès 같은 브랜드 그리고 미술관 아트숍과 프로젝트를 함께한 김영나가 국제갤러리 부산에서 개인전 <Easy Heavy>를 선보인다. 오래전부터 스티커를 모아온 작가는 여기에 얽힌 경험과 기억으로 과거 시간을 축적한다. 온갖 형상과 문구들로 채워진 스티커에서 그녀가 특히 관심을 가지는 부분은 기호와 지시문이다. 숫자나 도형, 글자가 인쇄된 스티커에서 이들 요소를 떼어내어 다시 구성하고 회화를 비롯한 평면작업이나 조각 그리고 벽화로 제작하여 이들을 전시장에 현대 미술로서 배치한다. 이번 전시는 대량 생산으로 누구나 쉽게 접하는 익숙한 대상이 낯선 환경과 시공간에서 문화를 새롭게 해석하는 기호로서 지닐 의미와 활용 영역이 어디까지 넓혀질지 흥미롭게 살펴볼 수 있을 듯하다. 전시 제목 ‘Easy Heavy’는 이렇듯 가벼워 보이는 대상과 기능이 지닌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미적 가치’를 깊이 있게 관람객들에게 전한다는 의도가 담겼다.
김영나 개인전 <Easy Heavy>가 열린 국제갤러리 부산점을 들어서면 마주하는 <SET> 신작 /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산뜻하고 예쁜 색을 띤 기하학적 도형들을 모은 <조각> 연작 /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그래픽 디자인 요소를 건축 · 공예가 포함된 현대 미술로 표현하여 전시장으로 끌어들인 김영나는 이번 전시에서 회화 · 조각 · 벽화 · 평면작업 총 40여 점을 공개한다. 국제갤러리 부산점에 들어서는 관람자는 크게 두 곳으로 나뉘어 있는 공간을 보게 된다. 첫 번째 공간은 벽화를 시작으로 작가의 대표 연작 <SET>를 비롯하여 그와 연관된 작품들을 선보인다. 2006년부터 2015년까지 디자인한 작업물에서 어떠한 연관성 없이 기하학적 형태를 작가가 정한 기준으로 분류하고서 종이 인쇄물이 아닌 벽에 거는 평면으로 보여주려고 만든 <SET> 연작은 표본 책이자 전시 관람에 도움을 주는 안내 책자와 같다. 그리고 전시장에서 처음 마주하는 벽화는 그 <SET> 연작 중 하나이다. 벽화 작품 ‘SET v.25: View N’(2024)과 그 벽화 일부를 다시 캔버스 위에 옮겨 그린 회화 ‘조각 25-1’(2024)은 신작으로, ‘이미지’가 지면이라는 평면에서 벽이라는 또 다른 평면으로 옮겨지고 마지막에는 전통적인 회화 매체인 캔버스 위에 정착하는 자유로운 여정을 보여준다. 전시 공간에 작품을 건 뒤에 전시회가 끝나면 벽을 하얀색으로 덮으면서 아쉽기보다 시원했던 감정마저 고스란히 전해진다. 벽화를 지나면 대표 연작 〈SET〉에서 파생된 일부를 캔버스에 옮긴 〈Piece(조각)〉 연작과 디자이너 스케치를 보는 듯한 〈Found Composition(발견된 구성)〉 시리즈를 만나게 된다.
알파벳을 떼어내어 글자 자국이 남은 스티커 용지를 연상하게 하는 작업들은 관람자들 역시 어린 시절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전시장 출입구에 있는 기둥을 둘러싼 구조물은 평소 눈에 띄지 않던 것으로, 김영나 작가가 여기부터 형광색 스프레이로 선을 긋는 벽화 작업을 선보임으로써 건축물의 구조적 기능에 미적 가치를 부여하였다. /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이어 두 번째 공간에서는 일상에서 쉽게 만나는 시각 언어, 이를테면 알파벳을 떼어내어 글자 자국이 남은 스티커 용지, 이삿짐 상자에 방 이름을 표시하는 라벨 스티커, 상장에서 흔히 보는 ‘상’ 글자를 뺀 꽃을 다양한 매체로 작업한 최근작들을 선보인다. 작가는 이를 통해 관람자들이 참신한 아이디어를 건네며 소통하기를 원한다고 밝혔다. 예를 들면 납부나 특정 요구사항을 독촉하는 ‘Final Notice(파이널 노티스)’(2023)는 강렬한 빨간색으로 글씨가 쓰여 있는데, 촉감은 부드럽고 포근한 모직으로 제작하여 전혀 예상하지 않은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차고garage와 주방kitchen처럼 일반적이지 않은 조합에서 우리 주거 생활이 변화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문화 흐름을 읽어내어 상상하는 폭을 넓혀갈 수 있다. 김영나 작가는 형광 스프레이로 출입구부터 두 번째 공간에 선을 긋고, 각각 새로운 영감을 불러오는 작품 하나하나를 선을 기준 삼아 벽에 걸었다. 한눈에 잘 보이지는 않는 작가만의 자율적인 법칙으로 연출된 이 무대에서 그녀는 미술사적 관점에서 벗어나 한층 생동감 넘치는 예술을 선보인다.
이렇듯 2차원 플랫폼인 인쇄물 속 디자인과 3차원 전시 공간 속 현대 미술을 구분하는 경계선에 서 있다고 자기를 소개하는 김영나가 이들의 관계성을 화두로 끌어올려 흥미로운 논의를 마련한 장은 6월30일까지 열린다.
김영나
Na Kim
김영나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 산업디자인학과와 홍익대학교 시각디자인 석사과정을 졸업하고, 2008년 네덜란드 아른험 미술대학에서 베르크플라츠 티포흐라피 석사과정을 마쳤다. 현재 베를린과 서울을 오가며 작가와 디자이너로서 활발히 작업하고 있으며, 베를린에 있는 프로젝트 스페이스 LOOM을 운영하고 있다. 주요 개인전으로는 2023년 베를린 에프레미디스 <TYVMXZU!!>와 서울 두산갤러리 <TESTER>를 포함하여 필라델피아 ICA 미술관(2021), 베를린 A to Z(2020),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2020) 등이 있다. 이외에도 리스본 건축 트리엔날레(2019), 뮌헨현대미술관(2017), 국립현대미술관(2015, 2013), 런던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2013), 뉴욕현대미술관(2012), 밀라노 트리엔날레 디자인 뮤지엄(2011) 등 국내외 그룹전에 다수 참여하였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파리 장식 미술 박물관, 뮌헨 디 노이에 잠룽-디자인 미술관 등이 소장하고 있다.
국제갤러리
Kukje Gallery
부산 수영구 구락로123번길 20 (망미동)
관람: 화요일(Tue) - 일요일(Sun), 10:00 – 18:00
(월요일·공휴일 휴관)
문의: 051. 758. 2239
영국 현대미술 전문지 <아트리뷰ArtReview>가 발표한 ‘2023 파워 100’에 92위로 선정된 이현숙 회장이 1982년 설립한 국제갤러리는 지난 40여 년 동안 한국미술을 대표하는 화랑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로버트 메이플소프, 루이스 부르주아, 아니쉬 카푸어, 알렉산더 칼더, 우고 론디노네, 장-미셸 오토니엘, 제니 홀저, 줄리안 오피 등 해외 주요 작가 개인전을 연달아 성공적으로 개최하였다. 또한 강서경, 권영우, 박서보, 양혜규, 유영국, 이우환, 최욱경, 하종현 등 국내 작가이 작업하고 해외로 진출하는 발판을 마련하며 지원하고 있다. 지난 2018년에는 부산시 수영구 망미동에 있는 복합문화공간 F1963에 국내 두 번째 지점을 개관하여 지역사회에 동시대 미술의 흐름을 접할 국내외 현대미술가 전시를 꾸준히 열고 있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제1회 ‘아트 바젤 파리+(이하 파리+)’에 참가하여 현지인을 비롯한 전세계 컬렉터들로부터 성과를 거둔 국제갤러리는 프랑스 파리 방돔 광장Place Vendôme에 첫 해외 지사를 열어 한국미술이 지닌 고유한 가치를 유럽에 적극적으로 알리고 있다.
Words by Grace
Still. Courtesy of Kukje 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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