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배, 철사를 엮어 아름다운 선율을 자아낸 <운명의 조우> 개인전
2024. 8. 28 – 10. 20
운명의 조우Shared Destinies
존 배JOHN PAI
갤러리 현대
드넓게 빈 곳. 그곳에 점 하나로부터 끝없는 길이 생긴다. 어딘가에서 가로막힌 듯하면서도 열린, 그야말로 자유롭고 유연하게 흐르는 길은 아름다운 선율이 되어 감정을 실은 채 흐른다. 누군가에게 매력적인 끌림을 전하는 이 선율이 어렴풋이 드러내는 형체는 생명력을 은근하게 뿜어내며 우주와 마주한다. 이 형체를 바라보는 누군가는 ‘우주가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일지, 멀어져 가는 것일지’ 묻고, 나와 거대한 존재가 연결된 듯하다고 느끼면서 사유를 이어가게 된다. 이렇듯 운명처럼 다가온 ‘조우’를 평생 철사로 작업한 조각가 존 배는 ‘음표 하나로부터 시작되어 끊임없이 다음 음표로 이어지는 내 작품은 ‘공간 속 드로잉’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서구 미술 운동이 변화하는 70여 년 동안 흐름을 그저 따르기보다 자기만의 예술세계를 독창적으로 일구어낸 존 배 작가는 철사 조각 · 회화 · 드로잉 40여 점을 개인전 <운명의 조우>에서 오는 20일까지 선보인다. 2013년 개인전 <In Memory's Lair> 이후 오랜만에 갤러리 현대에서 다시 열리는 이번 전시는 그가 지나온 예술 여정을 집약하여 보여준다.
“저의 작품은 한 음표에서 시작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많은 작품들이 말 그대로 점이나 선 하나에서 시작하지요.
(…) 레너드 번스타인은 “음악은 다음 음표에 관한 것이다”라고 쓰기도 했었죠.
제 작업도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어요. 다음에 올 음은 무엇일까?
(…) 마치 대화가 일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를 이어 나가면서
각각의 점들과 선들이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되지요.”
— 존 배 —
1937년 서울에서 태어나 12살 때 미국으로 이주하여 뉴욕에서 주로 활동해온 조각가 존 배는 독일에서 건너온 바우하우스와 환원주의적 추상 조각 등 미국의 예술적 토양에서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미술 외에도 음악 · 수학 · 과학 같은 다양한 학문 분야에 관심을 둔 그는 진리를 추구하는 동양 철학으로 아우르며 포괄적인 예술세계를 펼쳐 왔다. 그의 작품은 미국 미니멀리스트 조각가들이 용접한 조각과 조형 · 미학 측면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미리 완성된 형태를 정하지 않고 우연한 결과물을 추구하여 더욱 자유로운 음악을 품은 듯한 그의 철사 조각은 과학과 수학 원리로 직설적이고 명료하게 중심을 꿰뚫는 힘이 있다. 또한 자연에서 영감을 많이 받은 작가는 거미줄이나 산호가 얽혀 있는 듯한 형상이나 곡선으로 내부가 훤히 보이는 투명한 물방울 형태, 중심에서부터 형성되어 뿌리와 줄기로 이어지는 식물, 땅으로부터 위로 흐르는 듯한 아지랑이 등을 보는 듯한 형상으로 조각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점과 선으로 대화를 이어가는 작품이 인간과 우주 사이에서 끊임없이 매력적인 끌림과 긴장감을 더하여 또 하나의 생명체처럼 아우른 공간에 들어선 관람자를 색다른 경험으로 이끈다.
존 배 개인전 <운명의 조우>가 열린 갤러리 현대 전시장 1층 전경 / Courtesy of Gallery Hyundai
존 배 개인전 <운명의 조우>가 열린 갤러리 현대의 지하 전시장 전경 / Courtesy of Gallery Hyundai
1층과 지하 전시장에서는 1960년대 초기작부터 1990년대에 작업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유화 ‘Trompe L'oeil’(1960)는 미국 뉴욕에 있는 프랫 인스티튜트에 다니면서 산업 디자인을 공부하던 작가가 점차 조각과 순수 미술에 관심을 두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초기작 중에 ‘Untitled’(1963)는 자동차와 기계 부품을 재료로 사용한 작가가 자연과 서로 어우러져 울림을 주고자 한 의도를 고스란히 담은 1960년대 대표 작품이다. 이 작업은 조각가 테오도르 로스작Theodore Roszak, 캘빈 앨버트Calvin Albert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1970년대 작품으로는 존 배 작가가 어떻게 공간 속에서 드로잉을 할 수 있는지 조각과 대화하며 즉흥적으로 작업한 ‘Untitled 1970, Entitled 2021’를 비롯하여 뫼비우스 띠를 연상하게 하는 ‘Involution’(1974)과 ‘Sphere with Two Faces’(1976) 등이 있다.
갤러리 현대의 2층 전시장에서 연작 '<Heaven and Earth>1–7(2024)을 바라보는 존 배 작가 / photo by Dongeun Alice Lee
존 배John Pai. ‘Shared Destinies’, 2014 / Courtesy of Gallery Hyundai
존 배 작품 ‘Shared Destinies’(2014)의 상세 사진 / photo by Dongeun Alice Lee
2층 전시장(맨 위 사진)에서는 불교에 호기심을 품은 작가가 지닌 철학을 엿볼 수 있는 최근작을 소개한다. 그는 작품에 ‘도the way는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각자 삶의 방식과 믿음을 추구할 때 항상 대가가 따라온다’는 뜻을 담았다. 전시와 같은 제목인 ‘Shared Destinies’(2014)는 철사 하나와 뒤에 붙을 철사를 ‘운명’처럼 연결하여 외부가 곧 내부이고 내부가 곧 외부인 구조를 띠며, 아름다운 선율마저 떠올리게 한다. 이외에도 추상적 사고와 천문학에서 모티프를 얻은 조각과 드로잉 연작 등이 존 배 작가가 70여 년 동안 꾸준하게 이어온 예술 여정은 여전히 진화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존 배
JOHN PAI
1937년 서울에서 태어난 존 배는 12살 때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그는 1952년 웨스트버지니아주 휠링에 있는 오글베이 연구소에서 첫 개인전을 선보인 후에, 뉴욕 브루클린에 있는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산업 디자인을 전공하고 대학원 과정으로 조각을 수학하였다. 스물여덟 살에 프랫 인스티튜트의 최연소 교수로 임명된 그는 약 40년 동안 교직과 행정 역할을 맡으며 미술과 조각 프로그램을 이끌었고 2024년 프랫 인스티튜트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 개인전으로는 서울 갤러리현대(2024, 2013, 2006, 1993); 뉴욕한국문화원의 갤러리 코리아(2024), 뉴욕 시그마 갤러리(1997, 1994), 뉴욕 환기재단(1982) 등이 있다. 또한 뉴욕 컬럼비아 대학교 왈라흐 갤러리(2022), 로스앤젤레스 LA 카운티미술관LACMA(2022),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2010), 바젤 갤러리 바이엘러(2007), 워싱턴 DC 스미소니언 미술관(2003), 서울 환기미술관(2001, 1993), 뉴욕 뉴버거 미술관(2000) 등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다양한 기획전에 참여했다. 서울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하여 리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뉴욕 프랫 인스티튜트, 뉴욕 얼터너티브 미술관 등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작가는 현재 미국 코네티컷 페어필드에 거주하며 작업을 하고 있다.
갤러리 현대
Gallery Hyundai
서울 종로구 삼청로 14 (사간동)
관람: 화요일(Tue)–일요일(Sun), 10:00 – 18:00
문의: +82 2 2287 3500
Words by Grace
Additional photographs by Dongeun Alice Lee
Still. Courtesy of the artist and Gallery Hyund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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