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의 자유 | 지와 아트 레지던시, 바르셀로나 02
동해에 떠오르는 장엄한 일출은 아니었지만 작고 미묘한 자연의 변화를 지켜보고 나서 모두가 잠든 이른 아침에 조용히 숙소를 떠나는 나의 손에는 묵직한 네 개의 열쇠가 들려 있었다. 방 열쇠, 현관 열쇠, 정원 열쇠 그리고 대문 열쇠. 디지털 도어록(door lock)이 대부분인 서울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진 나에게는 열쇠꾸러미조차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외출할 때마다 열쇠의 개수를 확인하며 지난 시절도 함께 손에 꼭 쥐어 본다.
처음 며칠 동안은 작업성과를 내야 한다는 열망과 조급한 마음 탓에 낡은 샌들 바닥이 갈라지도록 바르셀로나의 새벽을 걷고 또 걸었다. 그 후에 깨달은 사실은 천천히 걸으며 논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면 더 많은 것들이 보인다는 점이었다. 멋진 사진을 찍어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고 눈앞의 것에만 집중하면 된다. 욕심 내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는 것도 좋다. 언제나 붐비기 일쑤인 유명 관광지까지 가기보다는 숙소 가까이에 있는 상점에서 무엇을 팔고 있는지, 제철 과일은 어떤 것이 있는지부터 확인해 보는 것이다. 이곳의 길은 일방통행으로만 연결되어 있는데, 도저히 차가 다닐 수 없을 정도로 협소한 길에 자동차, 버스, 트럭, 심지어 커다란 청소차가 다니고 있었다. 매일 늦잠을 잤다면 오전 여섯 시에 이 좁은 골목을 청소차와 부지런한 청소부들이 가득 채운다는 사실을 모르고 지나쳤으리라.
이웃들이 생활하는 광장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작업이 내가 묵는 숙소의 이름인 Jiwar(아라비아어로 ‘이웃’이라는 뜻)와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좁은 골목길을 걷다가 지루해지면 어김없이 탁 트인 광장이 나타난다. 바쁜 걸음을 재촉하던 사람들도 잠시 멈추었다 떠나는 곳. 목마르고 지친 모든 생명에게 물과 쉴 곳을 내어주는 곳. 그리스의 아고라에서는 철학과 민주주의가 꽃을 피웠고, 스페인의 플라자, 이탈리아의 피아자, 영국의 스퀘어 모두 사람들이 모여 삶과 예술을 이야기하는 장소였던 광장. 나는 광장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조각상과 기념비를 주로 촬영하면서 이 지역에 있는 광장을 다 찾아가보기로 했다.
차갑고 감정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보는 이의 기분에 따라 다양한 표정을 지으며 감정을 표현하는 조각상과 마찬가지로 광장의 모습은 시시각각 달라졌다. 아침과 점심, 저녁의 모습이 다른 바르셀로나의 일상. 그곳의 사람들은 생각보다 일찍 일어나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시에스타(라틴아메리카 등지에서 이른 오후에 자는 낮잠 또는 낮잠 자는 시간. 지중해 연안 국가와 라틴아메리카의 낮잠 풍습)를 염두에 두는 듯했다. 광장을 찾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가만히 앉아 있으니 그들의 일상이 손에 잡힐 듯 다가왔다.
구엘 공원, 성가족 성당, 그라시아 광장은 마음먹으면 충분히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위치해 있어 일부러 버스나 전철을 타지 않고 오로지 두 발로 걸어 다녔다. 나만의 장소를 만들거나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고, 집으로 돌아간 후에도 여행의 느낌을 오래도록 간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가족 성당까지는 숙소에서 30분이 넘게 걸리는 꽤 먼 거리였지만, 플라타너스 그늘 아래서 잠시 쉬어 가면 된다. 한때 심심찮게 볼 수 있었던 서울의 플라타너스는 자취를 감추었지만, 바르셀로나의 플라타너스는 풍성한 잎을 자랑하며 거리를 지키고 있었다. 걷는 동안 내가 보고, 듣고, 느낀 모든 사소한 것들은 사진으로도 남아 있지 않아 그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지만 잊지 못할 추억으로 마음속에 저장되어 있다. 이제 플라타너스를 보면 김현승의 시와 서울의 플라타너스와 바르셀로나의 플라타너스가 떠오를 것이다. 단 한 권의 책에도 사진 한 장 싣지 않았지만 오직 나만의 이야기로 간직하면서…….
구글(google) 지도를 켜고 한참 동안 동네를 돌아다녔지만 가고자 했던 시장 방향으로는 갈 수 없었다. 우연히 들어선 골목 끝에 문을 연 카페가 보였다. 오전 7시도 안 된 너무나 이른 시각이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카페로 들어갔다. 연세가 지긋해 보이는 할아버지가 지키고 있는 카페에서 커피와 크로와상을 주문하고는 저렴한 가격에 놀랐다. 단 1.2유로. 이 놀라운 커피 값은 바르셀로나의 어느 카페를 가도 별반 차이가 없었다. ‘이 맛있는 커피가 단돈 1,500원이라니!’ 이 일을 계기로 2018년 7월 20일부터 8월 3일까지 바르셀로나에서 머무는 동안 매일 한 곳씩, 총 열다섯 곳의 카페에 발 도장을 찍게 되었다. 어제 발견한 멋진 카페에 연연하지 않고 오늘은 새로운 카페를 찾아 나섰다. 아무리 비싸도 2유로를 넘지 않는 저렴한 가격과 커피를 담아 내주는 예쁜 도자기 잔을 만나는 일이 행복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 오래전 커피를 발견했다는 양치기들과 함께 바르셀로나 골목을 헤매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기도 했다. 따스한 커피가 온몸에 퍼지면 카메라를 든 채 온종일 걷고 촬영에 몰두하면서 생긴 피로가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그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고된 촬영의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내일 아침이면 새로운 카페에서 오늘과 다른 커피를 마시며 지친 몸을 쉬게 할 수 있으니. ‘현새로’라는 나의 예명에 어울리는 시간이었다.
온종일 낯선 도시의 골목골목을 헤매고 다니다 숙소가 보이는 길로 접어들면 복잡한 미로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안식처로 되돌아왔다는 안도감이 들고는 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주변 상점조차 이웃처럼 반가운 느낌이다. 이곳에는 과일 가게, 피자집, 카페, 여러 잡화를 파는 구멍가게, 정육점, 꽃집 등 별의별 상점들이 폰타나 역에서부터 죽 늘어서 있다. 길 초입에 있는 야자나무 아래는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이는데, 아이스크림을 먹는 사람이나 거리 공연을 하는 청년도 있었다.
나는 잠시 머물다 떠나는 여행객이 아니라 이곳 주민이 되어 거리에 서 있다고 생각했다. 매일 이 길을 걸으며 바르셀로나 사람처럼 가게에서 과일을 사거나 사진을 찍고, 밤에는 이탈리아에서 온 화가와 함께 아이스크림도 먹었다. 70퍼센트나 할인한다는 옷가게에도 들어가 보고 화방에서 그림 도구들도 구경했다. 빈티지 가구점과 인도 천 전문점, 맞춤옷 가게, 아시아 물건을 파는 상점에서 한국 라면을 사다 먹기도 했다. 육중한 대문을 열고 숙소로 들어가면 지정석에 앉아 털을 고르거나 따스한 햇살을 즐기며 늘어져 있다가도 아는 척하며 반겨주던 고양이 펠룻이 있었다.
빛이 좋은 아침마다 광장에 나가 사진을 찍고 숙소로 돌아와 여유로운 마음으로 사진들을 찬찬히 살펴보며 원하는 장면이 있는지 확인한다. 수확이 없는 날은 다시 사진을 찍어야 했으니까. 점심시간이 되면 레지던시 운영자가 알려준 맛집을 찾아 헤맨다. 식사가 끝나면 필요한 물건이나 먹고 싶은 과일을 샀다. 하루 종일 새로운 카페와 광장을 탐방하느라 피곤해진 날은 저녁 8시에도 잠이 쏟아져 제대로 된 저녁을 먹지 못하는 날도 부지기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동안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던 독특한 모자이크 타일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방, 거실, 부엌 등 모든 바닥을 뒤덮은 모자이크 타일의 규칙성과 구조에서 묘한 운치가 느껴졌다. 검이불루(儉而不陋),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다는 표현이 딱 어울렸다. 개성 넘치는 다양한 타일을 나 혼자 보기 아까웠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바로 나의 두 번째 프로젝트, ‘모자이크와 과일’이다. 광장 프로젝트가 내면의 소리를 따라 시작된 것이라면, 모자이크와 과일 프로젝트는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모자이크 타일의 다양한 무늬를 관찰하면서 어떤 과일이 어울릴까 고민도 해 보고, 반대로 과일 가게에 가서 모자이크 타일과 어울리는 과일을 찾는 시간이 더없이 즐거웠다. 사과나 오렌지처럼 낯익은 과일과 타일이 어울릴까? 아니면 모라(베리의 한 종류) 같은 낯선 과일? 모자이크 타일과 과일이 퍼즐 조각처럼 기가 막히게 조화를 이루며 딱 맞아떨어질 때의 희열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정말 대단했다. 정형성과 비정형성의 조화, 자연의 산물과 인간이 만들어낸 물건이 아름다운 대비. 여러 종류의 과일과 모자이크 타일을 어떻게 조화시킬지 실험해 볼 시간이 많지 않았지만, 콘셉트조차 잡지 못했을 때의 걱정이 사라져서인지 마음 편히 그라시아 지역을 벗어나 유명 관광지를 돌아볼 수 있는 즐거움도 누릴 수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못다 한 실험을 다음 여행에서 마저 할 수 있을까? 2026년 가우디의 성가족 성당이 완성되는 해에 다시 바르셀로나에 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날, 그곳에서 찍은 사진을 볼 때마다 광장의 독특한 숨결이 코끝을 간질이는 기분이다. 그때 마셨던 커피 향과 함께.
그라시아(Gracia) 광장은 Rius i Taulet으로도 불리는데, 아름다운 시계탑이 여행객의 눈길을 사로잡는 곳이다. 그라시아 지역 내 광장 중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편이다. 나는 소년 조각상의 입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장면을 찍기 위해 한 손으로는 카메라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수도꼭지를 누르며 고군분투 중이었다. 그때 불쑥 수도꼭지를 눌러주는 다른 손이 있었다. 한 중년 남성이 광장 어디에선가 여유를 즐기다가 혼자서 두 가지를 하느라 애쓰는 나를 보고는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준 것이다. 원하던 사진을 얻었다는 성취감도 있었지만 작은 친절을 베풀어 준 그의 따스한 마음씨가 내게 더 큰 기쁨을 주었다.
Words & photographs by Sairo H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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