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닿은 나와 나의 페르소나 | 태 킴, 공근혜 갤러리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이 된 청와대로 향하는 고즈넉한 서울 삼청동 언덕길을 걷는다. 그 길 따라 언제나 다양하고 흥미로운 전시로 맞이할 갤러리들이 줄지어 있다. 끝자락에 다다르면 모노톤 건물의 공근혜 갤러리가 눈에 들어온다. 갤러리 뒤로 예스러운 정취를 풍기는 돌담이 청와대 춘추문으로 이어진다.
늘 상상만 하던 공간이 경계를 허물고 많은 이들을 품듯이, <빌려 입은 피부>를 전시하는 공근혜 갤러리도 현대인이 비대면 일상에서 경험하며 느낀 감정, 생각 그리고 대비되는 현실을 예술 언어로 유니크하게 풀어내는 친근한 가상 세계로 초대한다.
빌려 입은 피부
태 킴 Tae KIM
공근혜갤러리 | 서울 종로구 삼청로7길 38 (삼청동)
MZ세대 대표 작가 태 킴이 전속된 공근혜 갤러리에서 5월22일까지 선보이는 이번 전시는 런던에서 시작하여 베를린으로 이어진다. 갤러리에 들어서면, 가상 공간에서 많은 이들과 연결되어 살아있음을 느끼며 정신적 안정을 찾는 ‘나’와 소통이 끊긴 현실에서 불안해하며 몸이 고통스러운 ‘나’의 괴리감을 직접 겪은 작가가 풀어내는 이야기와 마주하게 된다. 완벽한 세계에서 스스로 이상적 인격체(페르소나)라 여기는 아바타 혹은 ‘부캐’로 인간관계를 쌓아가는 현대인이 현실에서는 무기력증에 시달리거나 스트레스성 병치레를 하고 중장년이 되어 체력적 한계에 다다르면 혼란 상태에 빠져들게 된다. 동양 사상을 바탕으로 이러한 현실을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본 작가는 동양화 기법으로 섬세하게 묘사하여 생명력을 불어넣었고 회화·조각·영상·NFT에 담아냈다.
동양은 전통적으로 뇌가 몸을 관장한다는 뇌주설(腦主設)보다 사람은 심장에 정신이 깃들어 우주를 품는다는 심주설(心主設)을 따른다. 태 킴 역시 사물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가상 세계에서는 현대인이 더이상 한계를 느끼지 않고 새로운 육체와 여러 인격을 가진 정신이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어 심장을 중심으로 살아 움직이는 존재가 아닐까 탐구하였다. ‘초 연결 심(心) ’은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시공간과 한계를 뛰어넘는 현대인 모습을 표현한 작품이다. 유심히 살펴보면 입안 깊숙한 곳에 식도와 기도 외에 구멍이 하나 더 그려져 있다. 이 구멍과 연결된 통로로 에너지가 돌며 소우주와 같은 초월적 인격체는 생명력을 지니고 현시대에 공존하게 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비대면 일상에서 정신이 깃들어 살아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몸을 자주 잊는다. 캐릭터나 아바타가 나를 대신하거나 화면에 나를 드러내더라도 얼굴 위주로 누군가와 마주 보며 대화 나누는 일상이 반복되면서 점차 몸을 덜 인식한다. 아바타를 피부에 빗대어 옷처럼 빌려서 입는다고 표현한 작품 ‘빌려 입은 피부’는 사용자의 신체가 있어야만 가상 공간에서 이상적인 자아가 활동한다고 강조한다. 관람자가 작은 화면을 바라보고 표정을 지으면 디지털 회화로 만든 아바타가 이를 인식하여 똑같이 따라 하고, 그가 자리를 뜨면 다른 관람자를 맞이하려고 준비한다. 현대인은 여러 가상 캐릭터를 빌려 활동하여 경험과 기억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면서 새로운 사회적 존재로 남게 된다.
오래전부터 컴퓨터 게임을 즐겼다는 태 킴 작가는 2007년에 게임 사용자가 사망하면서 캐릭터만 가상 공간에 남았을 때, 그를 추모하기 위해 치러진 온라인 장례식에서 ‘잊힌 신체’를 다시 생각하였다. 이후 2018년에는 SNS를 끊고서 고립되었다는 생각에 몸이 매우 아팠고, 이 경험을 토대로 이번 전시 작품을 준비하게 되었다고 한다.
작가는 끊임없이 화면 안에서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을 상상하여 그린 초상화가 ‘얼굴 없는 게이머-익면의 여러분’이다. 게임을 하며 들은 목소리와 캐릭터, 운용 스타일, 승패에 따른 반응 등으로 짐작하여 신체 특성을 모르는 대상을 과연 어느 선까지 화폭에 담는게 가능한지 실험한 작업이다. 작품 제목은 게이머가 실제로 사용한 ID라고 하니, 관람자도 초상화에서 드러나는 감정과 행동을 보면서 피부를 빌려 입은 그들 모습이 새롭게 그려질 듯하다.
화면으로 보는 대상이 친근하지만, 항상 양방향 교류가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이 그를 떠올릴만한 무엇인가 갖기를 원한다. 이런 소유욕을 채워주는 것이 바로 굿즈이다. 가상과 현실 사이에서 비대면과 신체에 접촉하는 소유를 반복하며 형성되는 인간관계 형태에 주목한 작가는 굿즈 시리즈로 비스크 인형을 직접 제작하여 비대면이 익숙해진 현대인에게 손에 쥔 행복을 선사한다. ‘소유의 굿즈’는 ‘힝’, ‘ㅎ’, ‘ㅠ’ 등 온라인 게임에서 사용하는 단축어로 이름 붙인 도자기 인형 15점이고, 갤러리에 전시된 작품은 4점이다.
마지막 작품 ‘조합된 자아 ’는 가상 세계 안에서 현대인이 빌려 입는 피부가 가지는 희소가치를 탐구한 작업이다. ‘나’를 나타내는 프로필 사진은 기계가 조합한 확률에 따라 자아 형태를 만든다. 조합된 자아의 수는 3.703447349231616e+17(37경 344조)이다. 사람이 인식하기 쉬운 단위인 1,000개로 한정하여 제너레이팅 페인팅(자동생성 회화) 작업한 이미지에 담긴 희소성은 온라인에서 맺어지는 인간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가상 세계에서 다중인격자로 살아가는 현대인이 현실을 넘나들며 전하는 이야기에 눈과 귀를 기울이게 하는 이번 전시는 5월22일까지이며, 20일에 NFT 영상 작품 3점을 온라인에서 공개하여 판매한다.
태 킴(b. 1986)
서울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하고 서울대학원에서 석·박사를 수료하였으며 영국 런던 Slade School of Art MFA painting을 졸업하였다. 태킴은 하동철 창작지원상, 영국 Eileen Gray Scholarship과 Selected for Jer wood Drawing Prize를 수상하였다. 2021년 <Art in Culture> 영파워 아티스트로 선정되었으며, 영국·독일· 미국 미술계에서 주목받고 있다.
공근혜 갤러리
서울 종로구 삼청로7길 38 /Tel. +82 2 738 7776
Hours Tuesday–Saturday, 10:30 AM–5:30 PM / Sunday, 12:00 PM–5:30 PM
2005년에 개관한 공근혜 갤러리는 세계적인 사진작가들을 국내에 소개하며 사진 전문 갤러리로 이름을 알렸다. 삼청동으로 이전한 2010년부터 회화, 조각, 비디오, 설치 등 다양한 현대미술 전시를 선보이고 있다. 베르나르 포콩(프랑스), 마이클 케나(영국), 어윈 올라프(네덜란드), 펜티 사말라티(핀란드), 팀 파르치코브(러시아), 첸 루오 빙(중국) 등 세계적인 작가들과 전속 계약을 맺었고 젠 박, 민정연, 신혜진 같은 젊은 국내 작가들을 해외 미술계에 적극적으로 소개한다.
Words & photographs by Koeun Lee
Still. Courtesy of K.O.N.G. 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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