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며든 빛이 드러내는 시공간으로 초대합니다 | 서승원, PKM 갤러리
어리던 때,
내리비추는 빛줄기가
문창살에 덧댄 창호지에 스며든다.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화폭에는 작가 서승원이 기억하는
한옥 고유한 색과 형태,
비어있음과 정서가
그러모아져 담긴다.
2021.9.8 – 10. 9
서승원: 동시성-무한계
Suh Seung-Won: Simultaneity-No Limit
PKM 갤러리 | PKM & PKM+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고즈넉한 삼청동. 이곳에 자리 잡은 모던한 갤러리 PKM에 들어선다. 유하면서 따스한 빛이 중첩하며 파스텔톤으로 은은하게 물든 캔버스와 마주선다. 현대 감성으로 한국인이 품은 전통미와 정신을 세련되게 풀어내는 작가 서승원 그림이다. 작가가 어렸을 때 살던 한옥 곳곳에 놓인 형상으로 그려진 기억이 관람자에게도 오롯이 전해진다.
PKM 갤러리는 한국 기하 추상의 선구자이자 단색화 미학을 대표하는 서승원 개인전 《서승원: 동시성- 무한계》를 10월9일까지 연다. 이번 전시에서는 1960년대 후반에 작업한 초기 그림부터 올해 최신작까지 아우르는 회화, 드로잉, 판화 37점과 미공개 아카이브 자료를 선보인다.
서승원이 평생 추구해 온 화두는 ‘동시성’이다. ‘동시성’은 작가를 매개체로 하여,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피안彼岸)를 같은 시공간에 드러냄을 뜻한다. 작가는 유년 시절에 살던 한옥에서 색色과 형태形를 늘 가까이하였다. 집안에 놓여있던 소박한 백자 항아리, 책가도, 햇빛이 은근하게 투과하는 문창살과 창호지, 빨랫감을 매끄럽고 윤기 나게 하는 다듬이 방망이가 그것들이다. 그는 아늑한 공간空間에서 자연스럽게 체득하고 영향을 받았던 비어있음空과 그 정서를 떠올리고 끊임없이 걸러내어 같은 시공간에 놓는 동시성 개념을 사유한다. 그리고 심오하고 신비로운 예술 세계를 투명하게 펼쳐 보인다. 서승원 작품과 마주하는 이들은 동서고금을 아우르는 감성을 공유하게 될 듯하다.
이번 전시는 작가가 ‘동시성’이라는 유일한 화두로 처음 작업을 시작한 때부터 변화를 거쳐온 주요한 순간들을 되짚으며 둘러보도록 기획되었다. 특히 아카이브 자료들이 눈길을 끈다.
1962년. 서승원 작가가 한국인으로서 정신문화에 뿌리를 두고 현대화하는 작업을 시작한 해이다. ‘동시성Simultaneity’ 개념을 탐구하였다. 다음 해에는 국내 화단에서 전환점이 된 비구상 그룹 ‘오리진 Origin’ 창립에 참여하였다. 그룹 멤버는 홍익대학교 회화과 60학번 동기생 9명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그가 다른 멤버들과 함께 찍은 사진 그리고 1963년 9월 중앙공보관에서 가진 창립전 브로셔는 이번에 처음 공개한다. 또한 그는 전위 미술 운동인 ‘한국아방가르드협회 AG’에서도 창립 회원으로 활약하였다. 꾸준히 전시 활동을 하며 한국 미술이 확장하고 세계화하는 데 깊이 공헌하였다.
이 즈음에 작가가 선보인 한국 기하 추상은 밝고 선명한 색상과 명료한 네모꼴이 돋보였다. 다음 해에는 형태가 살짝 움직임을 보이고 여백을 더욱 효과적으로 살리는 화면 구성으로 바뀌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작가는 단단하던 형태를 무너뜨리고 해체하였다. 오랜 세월이 흘러, 고요한 정신세계와 비어있음에서 이어지는 무념에 다다르게 된다. 동시성 요소인 색과 형태, 공간을 부단히 변주하였다. 2021년 최신작 역시 새로운 시도로 얻은 결과물이다.
전시장에서 만난 서승원 작가는 관람자들이 시간을 들여 천천히 그림을 감상하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하였다. 맑은 채색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이번 최신작도 밑칠 작업을 거듭하며 공을 들였다고 한다. 작품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스며서 보이지 않던 새로운 색면色面이 드러난다. 우리는 그 깊고 무한한 공간으로 이끌리게 된다.
서승원 작가는 홍익대학교에서 회화 전공으로 학사 및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33년 동안 홍대에서 교수직을 역임하였다. 1963년 오리진 그룹, 1967년 한국현대판화가협회, 1969년 한국아방가르드협회를 결성한 주역이다. 또한 1975년 도쿄화랑의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개의 흰색》展에 참가한 작가로서 한국 전위 미술을 개진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성곡미술관, 뉴욕 브루클린 미술관, 파리 갤러리 페로탕, 도쿄 센트럴 미술관, 후쿠오카 아시아미술관, 홋카이도 근대미술관 등 국내외 정상급 미술기관 전시와 상파울루 비엔날레, 파리 청년 비엔날레, 부산 비엔날레 등 국제 미술 행사에 참여하였다. 한국미술대상전 최우수상, 한국예술평론가협회 올해 최우수 예술가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런던 영국 미술관, 아부다비 구겐하임, 시모노세키 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PKM 갤러리
서울 종로구 삼청로7길 40 /Tel. +82 2 734 9467
Hours Tuesday–Saturday, 10 AM–6 PM
2001년에 문을 연 PKM 갤러리는 동시대 미술 현장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끌어 나가고 있다. 단색화 거장 윤형근과 구정아, 이불, 코디최 등 한국 화단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전시를 개최해왔다. 또한 해외 저명한 작가인 존 발데사리, 올라퍼 엘리아슨, 댄 플래빈 등을 국내에 적극 소개하였다. 젊은 작가들 작품전도 기획하여 이들이 차세대 미술 주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기여하고 있다. PKM 갤러리는 2004년 한국 화랑 최초로 프리즈 아트 페어에 초청되어 한국 현대미술이 세계 미술시장으로 진출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이후 아트 바젤, 피악, 아모리 쇼, 엑스포 시카고 등 명망 있는 국제 아트 페어에 꾸준히 참가하고 있다. PKM 갤러리는 창립 14주년을 맞이한 2015년 4월, 삼청동 지역으로 이전하여 재개관하였다. 현재 최대 5.5m 높이 천장고를 갖춘 본관 전시장과 부티크한 별관 전시장을 보유한 대규모 화랑이다.
Words & photographs by Koeun Lee
Still. Courtesy of artist and PKM 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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