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거닐다 | White Cube Bermondsey, 런던
“날마다 런던은 내게 아름다운 곳으로 다가오는구나.”
클로드 모네가 누군가에게 적은 편지 글귀가 떠오르자, 타워브리지에서 자연스레 멈춰 선다. 곧장 화이트 큐브 갤러리로 향하던 생각을 바꿔서, 템스Themes 강변을 걷고 잠시 서고 또 걸어 목적지에 다다르는 ‘하루 여행’을 하려 한다. 갤러리와 가까운 런던브리지London Bridge역부터 골목 따라 산책하듯 거닐며, 이 도시가 보여줄 새로운 매력 혹은 시간이 흐르며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 무엇인가를 찾아낼 수 있을까.
시야에 펼쳐진 자욱한 안개 속에서 빛이 드리워진 템스강을 그린 모네의 런던 연작과 달리 타워 브리지 주변은 활기가 넘친다. 런던을 다니다 보면 탁구대를 설치한 작은 공원과 핑퐁ping-pong 카페들이 쉽게 눈에 띈다. 템스 강변에서도 9월 중순까지 야외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이 보였다. 때마침 타워브리지의 도개교 날개가 양쪽으로 열리고, 크고 작은 선박 몇 척이 지나간다. 도시를 길게 가로지르는 강변에는 런던아이, 샤드, 웨스트민스터 궁, 세인트폴 대성당 등 무수히 많은 랜드마크들이 자리하고 있는데 강을 따라 이어지는 부두 역시 볼거리 중 하나이다. 간신히 흔적만 남을 뻔했던 부두가 금융·쇼핑·과학 단지로 재개발되면서 템스강 동쪽 지역인 카나리 워프Canary Wharf, 로열 도크Royal Docks 등이 대표적인 항만 구역dockland이자 관광 코스로 탈바꿈하였다. 이렇듯 현대식 건축물들이 강가에 속속 생겨나고 있음에도 타워브리지 근처에서 바라보는 부둣가 풍경은 여전히 옛 정취가 남아 있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19세기 말경 완성된 그림 <웨스트민스터 다리 밑 템즈 강The Thames below Westminster>을 살포시 얹으니, 어슴푸레하게 보이는 웨스트민스터 궁과 선박들의 묘사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잠시 감상에 젖어 든다.
길을 재촉하기엔 아직 이르다. 지금 서 있는 템스강 동쪽 버몬지Bermondsey에서 터너의 <해체를 위해 예인 된 전함 테메레르The Fighting Temeraire Tugged to Her Last Berth to Be Broken Up>를 살짝 떠올려보자. 트라팔가 해전에서 위용을 떨쳤던 영국 해군 전함이 그 수명을 다하여 근대의 증기선에 예인 되는 모습이 담겨 있다. 터너가 이곳에 있었다.
뒤돌아 샤드 템스Shad Thames 골목으로 들어선다. 혼재된 과거와 현재의 문화는 곳곳에 여전히 남아 있었고, 그런 길을 느긋하게 걷는다. 버몬지 지역이 지금은 런더너가 살기에 세련된 장소로 탈바꿈했지만, 샤드 템스의 경우는 영국 황금기 빅토리아 시대를 지나면서 무역업이 급격히 쇠퇴하고서 빈 부두 창고들만 쓸쓸히 남겨졌었다. 이제는 카페, 레스토랑, 칵테일 바, 꽃집을 품은 아파트와 사무실로 바뀌어 걷고 싶은 예쁜 골목이다.
샤드 템스Shad Thames를 지나 버몬지 스트리트Bermondsey st.를 걸을 때는 지역 주민들이 오가며 들르는 작은 베이커리나 카페들이 눈에 띄었다. 마주치는 사람들 얼굴에는 미소 가득이어서 보는 내내 정겹고, 생동감 넘치는 오렌지와 핑크 색상의 패션앤텍스타일 박물관Fashion & Textile Museum을 지나칠 때는 발걸음도 한결 가벼워진다.
부두를 중심으로 무역업이 성행하면서 양모를 거래하는 가게들과 가죽 세공을 하는 공장, 맥주 양조장brewery 등이 늘어섰던 버몬지 지역은 샤드 템즈처럼 창고와 건물을 개조한 엔틱 가구 단지가 조성되었다. 시간이 흘러 현재는 젊은 아티스트와 디자이너 그리고 맥주 양조업자들이 모여들어 비어 마일과 개성 넘치는 스튜디오들이 생겨나면서 힙한 분위기로 또 한 번 바뀌었다.
버몬지 거리를 걸으며 오렌지색 건물이 인상적이던 패션&텍스타일 박물관은 이 지역을 대표하는 산업 발전의 상징이기도 했다. 화이트 큐브 갤러리 앞에 당도하였고, 아직 걷지 않은 길 쪽을 바라보자 그 끝에 시선을 사로잡는 교회가 있었다. 세인트 메리 막달렌St Mary Magdalen, 30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런던 폭격과 재개발 후에도 몇 안되게 이 거리를 굳건히 지키며 버몬지의 역사를 품은 건물이다.
이제, 건물 외관이 타워 브리지부터 거쳐온 골목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면서도 현대적으로 세련된 스타일이 가미된 화이트 큐브 갤러리로 들어선다.
세계적인 현대 미술 갤러리
화이트 큐브White Cube
첫인상은 이름 그대로 모던한 ‘화이트 큐브’다.
물론, 언제나 그렇지는 않다. 2019년 하반기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의 신작들로 구성한 대규모 전시 때는 마치 어둑한 관념 속 터널을 지났었다. 화이트 큐브는 매 전시마다 같은 공간인가 싶을 만큼 작가가 추구하는 컨셉과 생각, 작품에 담긴 철학을 반영하고 감각 효과를 극대화하여, 누구나 건물 경계 안에 들어오면 공감각적 심상을 깨우는 특별한 여행을 시작하게 한다.
화이트 큐브 설립자이자 아트 딜러 제이 조플링Jay Jopling이 런던 다른 지역에 열었던 첫 갤러리는 다소 작은 규모임에도 영국 젊은 작가들을 발굴하여 세계적인 아티스트의 반열에 올려놓았다면, 이 곳 버몬지 지점은 이미 현대 미술계에서 영향력이 있는 작가 전시를 메인으로 선보인다. 최근 전시 중 ‘Chicxulub’ 는 컨셉추얼 아티스트 얀 보Danh Vo가 인체 형상과 물질을 결합하여 기독교 정신을 훼손하는 부정적 영향력이 미치는 시대 흐름과 내부로부터 표출하여 형상화하는 삶의 본질이 갖는 연관성을 탐구한 결과물이다. 얀 보가 10여 년 전 독일에 있는 자신의 농장에서 선보였던 전시를 발전시켰다고 하는데, 전시장의 크고 작은 작품 하나하나까지 일관된 공감각적 컨셉을 지녔다. 또 다른 컨셉추얼 작가 세리스 웬 에반스Cerith Wyn Evans는 회화와 조각 설치로 미디어 작업을 하며, 최근 전시 ‘No realm of thought… No field of vision’에서는 지각의 현상학을 시적인 텍스트와 기호, 빛 그리고 사운드로 다뤄 관람객들의 공감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그 외에도 영 브리티쉬 아티스트yBa로 알려져 있는 트레이시 에민Tracey Emin과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 마크 퀸Marc Quinn, 공공미술 조각 작가 안토니오 곰리Antony Gormley, 전위미술가 듀오 길버트 앤 조지Gilbert & George 그리고 설치미술가 도리스 살세도Doris Salcedo 등 세계 최고 현대미술가로 꼽히는 이들의 전시는 신작 발표를 중심으로 여러 해에 걸쳐 이어지고 있다.
트레이시 에민이나 안토니오 곰리의 작품은 또 다른 런던 지점에서도 감상할 수 있는데, 국내 단색화 대가인 박서보 개인전이 두 번 열렸던 화이트 큐브 메이슨스 야드Mason's Yard이다. 두 지점은 건축면에서 유사한 모던 컨셉을 지녔지만, 설립 목적과 방향성 그리고 주변 환경의 역사가 확연히 다르다. 버몬지에서 마주했던 이야기나 감정과는 또다른 무엇인가를 찾아내고 싶다면 이다음에는 그린파크 근처 메이슨스 야드 골목에 자리 잡은 화이트 큐브 갤러리로 가봐도 좋겠다.
경계를 지나 다시 거리로 나선다. 갤러리 앞에서 멀리 보였던 세인트 메리 막달렌 교회 옆 버몬지 스퀘어에서 열리고 있을 앤티크 마켓으로 걸음을 재촉한다.
Al Held The Sixties
2020. 11. 20 – 2021. 02. 27
White Cube Bermondsey
144 – 152 Bermondsey Street London SE1 3TQ
https://whitecube.com
Words & photographs by Koeun Lee
Still. Courtesy of White C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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