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편집: 2024년09월11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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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과 슬픔 사이를 넘나드는 붉은 감정

행복과 슬픔 사이를 넘나드는 붉은 감정

 입력: 2024.06.26(수)

  무언가에 정신을 쏟으며 걷다가 빨간 시그널을 마주하면 퍼뜩 놀라 얼떨결에 멈추어 선다. 삶에도 그런 때가 가끔 있다. 행복과 슬픔 사이를 넘나들며 질주하다가 브레이크가 걸리는 일. 불꽃처럼 타오르다가 붉디붉은 상처를 남기는 일. 우리는 흔히 인연을 그렇게 시작하고 또 끝낸다.

붉은색은 다양한 문화권에서 사랑을 상징한다. 일본 전통 의복에서 빨간색은 젊음·화려함·열정을 암시한다. 남 인도에서는 행복을 나타낸다. 그래서 신부는 루비레드 사리(sari·천으로 몸을 말 듯이 휘감는 전통 의상)를 고른다. 힌두교 가정에서는 락슈미 여신이 집에 순수와 번영을 가져온다고 생각해 다리에 붉은 가루를 뿌린 후 집안에 들어가 발자국을 남긴다.  발칸반도 신부들은 불꽃 같은 베일을 쓰는 관습이 있는데, 이는 붉은빛이 다산과 사랑을 보장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붉은색은 비극·파멸·위험과 같은 강렬한 감정들을 암시하기도 한다. 사랑이 꼭 행복만을 뜻하지는 않는 것처럼 빨간색은 사랑 혹은 비극, 행복 또는 슬픔, 축복이나 파멸 그 사이 어디엔가 존재한다.

앙리 마티스 <Harmony in Red>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The Dessert: Harmony in Red (The Red Room)’, 1908 / Courtesy of Henri Matisse & Hermitage Museum

마티스 그림 속 평화로워 보이는 프랑스 가정의 부엌은 벽도 테이블도 온통 붉다. 이 붉은 공간은 아르누보 장식의 영향을 받은 듯 아라베스크 무늬가 굽이치며 벽을 타고  올라간다. 붉은 실내와 극적으로 대비된 창문 밖은 나무와 들판의 짙푸름이 집안으로 파고들 듯하다. 생기 넘치는 붉은 방, 평화로운 창밖의 짙은 초록빛, 거기에 여인의 무채색 옷이 서로 다른 분위기를 품으며 색의 조화를 이룬다.

“색은 우리에게 현재 존재하는 하나의 현실이 아니라
생각하고 꿈꾸고 상상하게 하는 요소이다.”
-앙리 마티스-

이 그림은 처음에 전체 톤이 푸른빛이고 제목도 ‘푸른색의 조화’였는데 완성 단계에서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마티스는 보색 원리를 이용하여 작곡가가 화음을 연구한 듯 회화를 구성했다. 때문에 그림 속 여인, 벽면 무늬, 창밖 풍경이 강렬한 붉은 색채에 묻히지 않고 오히려 돋보인다. 이 작품은 공간의 불분명한 형태와 구분 때문에 ‘색면 추상’의 시초라는 평을 받기도 한다. 본래 푸른 작품을 구매하기로 했던 사업가 셰르게이 스킨은 붉은 색감으로 완성된 그림을 보고 처음에는 놀랐으나 결국 더 마음에 들어 했다.

마크 로스코 <Untitled>

마크 로스코Mark Rothko. ‘Untitled’, 1970 / Courtesy of Mark Rothko & Tate Modern

여기 핏빛으로 가득찬 캔버스가 있다. 1970년 2월25일 수요일 아침 마크 로스코가 자기 스튜디오에서 자살로 생을 마친 날, 이젤에는 이 거대한 붉은 그림이 걸려 있었다. 캔버스는 온통 피에 젖은 듯, 그 가운데 난 선은 머뭇거리며 손목에 그어진 칼자국인 듯 로스코가 남긴 마지막 그림은 그의 마지막 날만큼이나 강렬하다. 항우울제를 지나치게 복용하던 로스코는 예순다섯 해를 살고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내 그림 앞에서 우는 사람들은 내가 그림을 그릴 때 겪은 것과 똑같은 종교적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들을 표현하는 데에 관심이 있습니다. 비극이나 무아경·파멸 같은 것들 말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내 그림 앞에 설 때 힘없이 무너지고 눈물을 흘린다는 사실은,
내가 그 기본적인 감정들을 잘 전달했음을 입증합니다.”
-마크 로스코-

 

오로지 한 가지 색으로 감정을 전하려 했던 마크 로스코. 2015년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로스코전을 찾은 관람객들은 그의 그림 앞에서 무력해지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그들은 생각에 깊이 잠기거나 그림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감정을 공감케 하는 일은 이렇게나 간단하다. 긴 설명 혹은 복잡한 구상具象이 필요치 않다. 작가가 선택한 한 가지 색과 그 빛깔을 품은 거대한 캔버스로도 충분하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 혹은 이별하는 연인이 긴 말을 하지 않는 것처럼.

1950년대 뉴욕 시그램 빌딩은 고급 레스토랑 포시즌스에 걸 벽화를 로스코에게 의뢰했다. 주문한 그림은 7개였으나 로스코는 40여 점을 그렸다. 그런데 그것들을 그리던 어느 날 로스코는 느닷없이 포시즌즈에 계약을 취소하겠다고 알렸다. 왜 그랬을까. 단일색면화를 제작하는 그에게는 뚜렷한 작품 감상 규칙이 있었다. 자기 그림을 온전히 관람하려면 관람 시간이 최소 15분 필요하고, 그림과의 거리는 45cm 정도여야 하며, 어두운 조명 아래 작품을 설치해야 한다는. 그것은 그저 ‘장식’하려고 시끌벅적한 레스토랑에 걸어서는 지킬 수 없는 조건이었다.

그 뒤로 여러 미술관이 로스코 그림을 소장하려고 애썼는데, 세 가지 조건을 다 받아들여 그의 그림을 모두 소장하게 된 곳은 ‘로스코 룸Rothko Room’을 만들어 주기로 한 런던의 테이트 모던이다. 로스코 방은 모네의 <수련>이 걸린 방 앞에 있다. 공교롭다고 할까. 로스코와 모네는 전혀 다른 화풍을 지녔지만 ‘명상적 느낌’을 관람객에게 전달하고자 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붉은 그림 <무제Untitled> 앞에서 로스코의 슬픔에 동화되는 명상적 경험을 한 사람들은 모네 그림 앞에서는 빛의 변화에 동화되는 명상적 경험을 하게 된다.

로이 리히텐슈타인 <Happy Tears>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 ‘Happy Tears’, 1964 / Courtesy of Roy Lichtenstein Foundation

과연 눈물이 행복할 수 있을까? 행복과 슬픔은 참 멀어 보인다. 하지만 소설가 생텍쥐페리는 사랑이 행복과 슬픔의 두 얼굴을 하고 있으니 결국 행복과 슬픔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가 말했듯이 그림 속 붉은 머리 여인은 눈물을 흘리면서 웃고 있다. 행복에 겨워 우는지 펑펑 울다 잠시 웃는지는 모른다. 다만 리히텐슈타인이 여인의 내면을 만화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무거운 감정을 가벼운 역설로 풀었다는 것만 알 수 있다. 그렇듯 가벼움과 무거움은 종이 한 장 차이이다. 작가는 감성이 예민한 그림 속 여인과 달리 매우 기계적인 작업 방식을 택함으로써 어떠한 개성도 드러나지 않는 중립적 냉정함을 유지했다. 이는 인상파 작가들이 붓 터치를 이용하여 빛의 일렁임을 표현한 것과 대조된다.

 <행복한 눈물Happy Tears>은 2022년 11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715만9천500 달러에 낙찰된 고가 미술품이다. 강렬한 원색, 굵은 윤곽선 그리고 오래된 만화책에서나 볼 법한 촌스러운 아가씨를 담은 이 작품은 대중적인 만화풍 그림도 미학적으로 느껴질 수 있게 함으로써 미술사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키치해 보이는 이 단순한 그림을 이루고 있는 벤 데이어 닷 하나하나는 작가의 고된 노동 결과이다. 때문에 멀리서 보면 일정해 보이는 동그라미들이 가까이서 보면 삐뚤빼뚤하기도 하다. 마치 여인의 눈물이 슬퍼서인지 행복해서인지 가까이서 들여다보지 않고는 알 수 없듯이.

생텍쥐페리는 ‘사랑이 있는 풍경’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사랑은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만큼 가슴 시릴 정도로 슬픈 것일 수도 있어. 때로는 너무나 행복해서 저절로 눈물이 흐를 때도 있지만, 때로는 슬픔 속에서 행복에 잠기는 순간도 있어.’ 한없이 평화로워 보이는 마티스의 붉은 실내도, 우울증 진단서 같은 로스코의 핏빛 캔버스도, 행복한 듯 슬픈 듯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 리히텐슈타인의 빨간 머리 여인도 결국 하나의 붉은빛 안에 존재한다. 사랑도 비극도 축복도 파멸도 우리가 지나쳐온 수많은 순간에 잠시 존재했던 짧은 감정일 뿐이다. 그저 붉은색으로 설명되는 지나간 우리 젊은 날의 행복하고도 슬픈 한때인 듯.


Words by Rosie Suyeon Kang
Main Still. photographs by Dongeun Alice Lee
Still. Courtesy of Henri Matisse & Hermitage Museum
Still. Courtesy of Mark Rothko & Tate Modern
Still. Courtesy of Roy Lichtenstein Found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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