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마에서 길어올린 세 가지 파란 빛깔
뉴욕에 도착한 뒤로 사흘을 비가 내렸다.
하늘은 어두운 파란 빛깔을 띠었다.
마치 런던의 잿빛 날씨를 내가 뉴욕까지 데려간 것처럼.
강 위에도 어두운 하늘을 반사한 물결이 칙칙한 푸른빛으로 천천히 일렁인다.
세상을 감싸는 가장 높은 곳과 가장 깊은 곳, 하늘과 바다는 모두 푸르다. 그래서일까, 색채 전문 회사 팬톤Pantone에 따르면 사람들이 좋아하는 색으로 가장 많이 꼽는 것은 파란색이라고 한다. 하지만 영어로 blue는 우울 혹은 고독을 뜻하기도 한다. 푸른빛은 사랑받는 색채이면서도 그 빛깔에 담긴 분위기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느껴보았을 법한 인류 보편적 감성을 품고 있다. 그렇게 파란 빛깔은 차갑고도 따뜻한 양가적 요소를 저만의 푸른 실로 연결한다.
파란 빛깔이 품은 다양한 감각들이 작품을 창작할 때 영감을 주었을까. 혹은 푸르름이 지닌 정취가 물감을 고를 때 본능적으로 화가들의 선택을 이끌었을까. 시대를 불문하고 수많은 예술 작품에는 푸른 빛깔이 등장한다. 색채를 중시한 이집트인들의 장식 예술에 사용된 이집션 블루, 12세기 이후에 그려진 마리아의 성스러운 청색 의상, 그리고 근현대에 들어서 안료가 발달하면서 탄생한 인디고 블루, 코발트 블루, 울트라 마린 블루까지. 이렇듯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화가들은 파란 색채를 흔히 사용했다.
뉴욕을 대표하는 현대 미술관 모마에도 시대와 국가를 넘어 푸른 빛깔로 자기 세계를 펼쳐낸 세 사람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이들은 미술사에 각기 다른 기념비적 자취를 남겼다. 단색화의 대표작으로 자리매김하거나(이브 클라인 ‘블루 모노크롬’), 동양 모노파 사조의 시초가 되었으며(이우환 ‘선으로부터’), 피카소에 대적하여 야수파의 주축을 이루었다(앙리 마티스 ‘춤’).
이브 클라인 ‘블루 모노크롬’ (1961년)
‘푸른빛’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작가 이브 클라인. 그는 파란 색채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즐겨 사용하던 울트라 마린 계열 블루를 자기의 고유한 색 ‘International Klein Blue (IKB)’라고 명명했다. 캔버스를 온통 푸른빛으로 채우는 모노크롬 추상화에서부터 인체를 붓으로 이용해 파란 물감 흔적을 남기는 그림, 그리고 프라이빗 뷰에서 관람객에게 푸른빛 칵테일을 제공하는 참여형 전시 등 파란 빛깔을 향한 그의 사랑은 기나긴 미술 역사에서 유달리 두드러진다.
모마 4층 406 방에 소장된 이브 클라인의 <블루 모노크롬>에는 그가 열아홉 살 때 니스 해변에서 바라보며 그려야겠다고 다짐한 깊고 진한 푸른빛 하늘이 담겼다. 그에게 파란색은 채워야 할 빈 공간이자 우리를 둘러싼 공기 그 자체였기에 세계를 의미했다고 한다. 1959년 소르본 대학에서 “나는 색을 통해 무형의 세계를 알게 되었다”라고 말하며 색채를 향한 특별한 열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우환 ‘선으로부터’ (1969년)
이브 클라인이 서양의 파란 빛깔을 대표하는 화가라면, 동양에는 이우환 작가의 절제된 푸른빛 세계가 존재한다. ‘존재와 무를 넘어서’(1969년), ‘표현 작업으로부터 만남의 세계로’ (1969년) 같은 비평으로 모노하의 이론적 토대를 완성한 이우환의 작품은 화가보다 문인으로 먼저 명성을 얻은 그의 삶과 닮았다. 그래서 하고자 하는 말들을 깎아내어 최소한의 문장으로 의미를 전달하는 시인처럼 그는 점과 선 등 단조로운 형태로 작업 세계를 표현한다.
모마 4층 413 방에 자리 잡은 이우환의 <선으로부터>(1974년)에는 묵직한 장대비가 내리는 듯이 굵고 직선적인 결이 그어져 있다. 여기서 일렬종대인 푸른 선들은 모두 비슷한 속도로 움직이지만, 어느 것 하나 같지 않다. 선들은 그 자체로 완성이 아니라 운율적인 붓질, 옅어지다가 결국 소멸하는 물감, 그리고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하얀 여백과 함께 조화를 이루며 의미를 형성한다. 때문에 회화의 결과물보다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이우환 작업 세계의 본질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수행적 작품 제작 방식은 언뜻 보면 누구나 그릴 수 있다고 오해를 살 법한 회화를 철학적으로 성찰할 대상으로 승격시킨다. 감정이 드러남을 억제하며 질서를 지키는 만들기 과정에서 작가의 담백하면서도 깊은 성찰이 캔버스에 담기기 때문이다. 그렇게 빚어진 정갈한 푸른 빛깔 선들은 우리를 사유 세계로 이끈다.
앙리 마티스 ‘춤’ (1909년)
형태를 강조한 입체파 피카소와 달리 색채를 강조한 야수파의 마티스. 그의 작품 세계는 20세기 회화운동을 이끈 표현주의와 추상주의의 근간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1953년 작고하기 전 ‘아이의 눈으로 삶을 바라보는’ 자세를 강조했다. 실제로 그는 순수와 맑음을 뜻하는 파란색을 작품에 즐겨 사용했다. 모마의 대표적 소장품 ‘춤’ 외에도 파리 퐁피두센터 현대 미술관에 전시된 ‘푸른 누드’(1952년) 등에서 그가 푸른빛에 품은 애정을 느낄 수 있다.
모마 5층 506방 한 벽면을 통째로 차지한 대형 캔버스. 거기에 등장하는 다섯 인물은 서로 손을 맞잡고 강강술래를 하듯이 춤을 춘다. 들어올려진 무릎과 바깥을 향한 발 모양에서 인물의 율동감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 흥겹고 순수한 움직임 뒤에 낭만적인 푸른빛이 보인다. 푸름을 배경으로 한 살굿빛 인물들과 발아래 초록 잔디는 네 가지 색채로 대형 캔버스를 메웠다. 동시에 원근법을 무시한 형태로 묘사된 인물들은 순환하는 계절처럼 원을 그리며 자연의 섭리와 조화와 화합을 표현한다. 즐거운 춤은 이윽고 캔버스 밖 전시장에까지 전해져 미술관을 온통 밝고 행복한 기운으로 채운다. 그리하여 그 앞에 앉아 작품을 감상하는 관객들은 파란 빛깔 춤이 자아내는 환희를 만끽한다.
뉴욕을 떠나는 날, 날씨가 유난히 화창하다. 매일 보던 강에는 맑은 하늘의 푸르름이 비쳐 아름다운 윤슬을 이루었다. 도시를 둘러싸던 우중충한 공기는 어느새 완연한 가을 하늘로 변모했다. 계절이 바뀌는 사이 모마에서 서로 다른 시대와 공간을 산 세 작가가 길어올린 세 가지 파란 빛깔을 만났다. 그것은 일상적으로 너무 자주 마주해 더 이상 어떠한 새로움도 찾지 못했던 세상의 색채들을 새로이 발견할 수 있도록 안내해 주었다. 이것이 예술이 지닌 진정한 힘이 아닐까. 세상을 구성하는 다채로운 색채들을 감상할 시야를 얻고, 그 색채 사이에서 나만의 가장 아름다운 빛깔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배우는 일.
여행을 마칠 즈음 긴 여정을 추억할 가장 좋은 기념품은 권태로운 풍경을 신선하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선사 받는 일임을 깨달았다. 마치 내가 마티스의 푸른빛 환희의 춤을 본 뒤로 날마다 마주한 강가의 물결에서 남달리 아름다운 파란 빛깔을 길어올렸 듯이 말이다.
Words by Rosie Suyeon Kang
Additional photographs by Koeun Lee
Still. Courtesy of the artist and Mo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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