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편집: 2024년05월16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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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트가 품은 어둡고 하얀 이야기

테이트가 품은 어둡고 하얀 이야기

  런던을 찾은 여행객이라면 한 번쯤 방문하는 테이트 모던Tate Modern. 1900년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현대 미술 작품 7만여 점을 수집해 소장한 영국의 대표 미술관이다. 테이트 모던은 1980년대에 공해 문제로 폐쇄된 화력발전소를 리모델링해 2000년에 공공 미술관으로 개관하였다. 개념미술·설치미술·미디어 작업 같은 순수 미술 성지로서 제니 홀저, 피에트 몬드리안, 알렉산더 칼더 등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게다가 이 미술관 6층 카페에서 바라본 템스 강과 세인트폴 대성당이 무척 아름다워 관람객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테이트 모던 6층 카페에서 바라본 템스 강. 아름다운 풍경 안에 밀레니엄 브리지와 세인트폴 대성당도 있다. /Courtesy of Rosie S. Kang

테이트 모던Tate Modern(왼쪽), 테이트 설탕(오른쪽)

테이트가 운영하는 갤러리는 테이트 모던뿐 아니라 세 곳이 더 있다. Tate Britain(맨 위 사진), Tate Liverpool, Tate St.Ives. 이렇듯 규모가 큰데도 테이트 갤러리 네트워크에는 일반 관람객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가 있다. 테이트는 설탕 정제 사업으로 막대한 부를 쌓은 기업가 헨리 테이트의 소장품과 기부금으로 처음 설립되었다. 테이트 리버풀이 세워진 것도 헨리 테이트가 리버풀 항을 통해 설탕 무역업을 한 데서 연유한다. 이제는 설탕보다 미술관으로 널리 알려진 테이트이지만 아직 영국 마트의 진열대에서는 테이트 로고가 그려진 하얀 설탕을 쉽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사탕수수를 재배해 부를 쌓은 그는 흑인 노동력 착취와 같은 인권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 하다.

물론 최근 테이트 사의 설탕은 공정 무역을 지지하며 윤리적인 제조·유통 과정을 지킨다고 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약자의 희생과 노역을 토대로 부강해진 테이트ㅡ 더 넓게는 영국의 오래된 역사 ㅡ는 바뀌지 않는다. 이러한 문제를 작업 주제로 삼은 현대미술가가 여럿 있는데, 그중 한 사람이 흑인 여성 카라 워커다. 그녀는 하얀 설탕을 재료로 삼아 거대한 스핑크스 조각 ‘A Subtlety’(2014년)를 만들어 과거 테이트 사의 제3세계 노동력 착취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대형 설탕 스핑크스 앞에 어린이들이 사탕수수 재배에 동원된 모습이 보인다. Kara Walker ‘A Subtlety’, 2014 /Courtesy of Kara Walker & Creative Time

“미묘한, 혹은 경이로운 설탕 조각은 설탕 정제 공장이 철거됨을 계기로 삼아, 사탕수수밭에서부터 서구의 부엌까지 달콤한 맛을 전하고자 무급으로 과중한 노역에 시달린 사람들을 기린 오마주입니다.” -카라 워커 (2014년)

 

테이트 모던 1층 터바인 홀에는 2019년 카라 워커의 또 다른 작품 ‘Fons Americanus’가 전시되었다. 설탕 스핑크스와 맥을 같이하는 이 작품은 오랜 세월 박탈당한 흑인 인권에 대한 메시지를 담았다. 거대한 하얀 분수는 버킹엄 궁전 앞 ‘Victoria Memorial’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하는데, ‘Victoria Memorial’은 1800년대 패권을 잡은 빅토리아 여왕의 재위 기간을 기념하는 분수이다. 빅토리아 여왕은 가장 많은 식민지를 가장 긴 시간 동안 통치한 군주이다. 이 시기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린 대영제국 최전성기와 일치한다.

하얀 분수는 멀리서 보면 무척 아름답지만(왼쪽) 가까이 다가가면 흑인 어린이가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게 된다.(오른쪽) Kara Walker ‘Fons Americanus’ Hyundai Commission at Turbine Hall, 2019/ Courtesy of Kara Walker & Tate Modern

서구 열강의 눈부시게 빛났던 과거. 그리고 그 뒤에 숨겨진 수많은 희생. 멀리서 보면 숭고해 보일 만큼 아름다운 새하얀 분수는 가까이에서 볼 때 비로소 진실을 드러낸다. 대영제국의 위용을 뽐내는 권력자 조각상에 흑인 여왕, 흑인 항해사, 상어에게 위협 당하는 흑인 아이의 모습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다가가지 않으면 보이지 않고, 귀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다. 카라 워커가 재탄생시킨 ‘Fons Americanus’는 슬픈 이야기를 작게 속삭인다. 하얗지만 어떤 암흑보다 어두운 역사를 가진 테이트의 백설탕과 카라 워커의 흰 분수는 닮았다. 나아가 ‘Fons Americanus’가 전시된 터바인 홀은 한국의 현대자동차가 후원하는 공간이다. 한국 또한 오랜 식민 지배로 고통받은 피해 국가인 점을 감안하면 카라 워커 작품이 전시된 장소가 지닌 의미는 더욱 커진다.

Hew Locke 'The Procession', 2022 /Courtesy of Hew Locke & Tate Britain

역시 런던에 있는 테이트 브리튼에서는 미술관 복도를 가로지르는 대규모 퍼레이드가 펼쳐진다. 2022년 영국 현대미술가 휴 로크의 설치 작품 ‘The Procession’(행렬)이다. 색색깔 의상을 입은 어린이와 어른 들이 너나없이 대형 퍼레이드에 등장한다. 하지만 참가자들 얼굴은 모두 가려져 있다. 그래서 화려하고 매혹적이지만 어딘가 기이하고 무섭다. 특히 가운데 새하얀 옷을 입은 어린이는 큰 모자를 눌러쓴 채 땅만 바라보며 걷는 모습이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행렬 참가자들은 중국 황제 통치, 러시아 석유산업, 아프리카 식민지 따위가 인쇄된 옷을 입었다. Hew Locke 'The Procession', 2022 /Courtesy of Hew Locke & Tate Britain

행렬에 가까이 다가가면, 참가자들이 노예화와 식민지 억압을 알리는 자료가 인쇄된 옷감을 걸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휴 로크는 헨리 테이트의 설탕 사업을 포함한 아픈 역사를 긴 행렬 내내 암시하며 오늘날 인류가 나아가야 할 더 나은 미래를 고민하게 한다. 테이트 브리튼을 이루고 있는 단단한 건물의 외벽, 그 안을 구성하는 고귀하고 값비싼 미술품, 그리고 이 모든 부귀영화 뒤에 숨겨진 희생자들. 그들이 시간과 공간을 거슬러 올라와 미술관의 한가운데에서 화려하지만 슬픈 퍼레이드를 함으로써 우리를 일깨운다. 이렇게 휴 로크는 ‘역사적, 문화적 짐historical and cultural baggage’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테이트가 짊어져야 할 지난 시간의 무게를 재차 강조한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세계적 미술관. 하지만 이곳을 찾는 관람객이라면 테이트가 탄생한 이면에 누군가의 희생과 눈물이 있었음을 한 번쯤 떠올려야 하지 않을까. 우리를 매혹하는 영국의 풍요한 문화와 흰색 미술관들이 그리 깨끗하지 못한 과거 이야기를 종종 품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되새기면서.

Words & photographs by Rosie Suyeon Kang
Additional photographs by Koeun Lee
Still. Courtesy of Kara Walker & Creative Time
Still. Courtesy of Kara Walker & Tate Modern
Still. Courtesy of Hew Locke & Tate Britain
Still. Courtesy of Tate & Ly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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